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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2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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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갑과을의 파트너십은 어떻게 가능한가?(네이버 캐스트)
작성자 오규재 휴대전화 010-3212-0314

1999년 8월 12일 프랑스 농부인 조세 보베(José Bové)가 프랑스 서남부 미요(Millau)에 있는 맥도널드(McDonald's) 건물 신축 공사장에 들어가 기물을 파괴해 재판을 받게 된 사건은 맥도널드 반대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보베는 햄버거로 대표되는 요리 문화의 브랜드 획일화와 다국적 기업의 침입으로 공동체가 받게 되는 충격에 대해 분노했다. 2000년 7월 보베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위자들이 “맥도널드를 거부하자”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시위는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 어느 곳에서건 반미 시위나 반세계화 시위만 벌어졌다 하면 맥도널드 매장이 습격을 당하곤 했다.1)

 

중국의 한 기차역에 설치된 거대한 맥도널드의 사인. 맥도널드는 오늘날 전 세계 120개국에 3만 4천여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어디 그뿐인가. 맥도널드는 쇠고기 대량생산, 포장지, 노조 불인정, 값싼 노동력 고용 등으로 환경보호운동가들에서부터 인권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 120여개국에 걸쳐 3만4천여개의 매장을 두고 ‘햄버거 제국주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맥도널드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갑을관계, 특히 프랜차이저(franchiser: 가맹점 영업권 제공 회사)와 프랜차이지(franchisee: 가맹점)의 관계다. 을의 강점과 장점을 이용함으로써 갑의 장기적 번영을 이루려는 게 아니라, 을을 압박하고 착취함으로써 단기적인 이익을 얻되 장기적으론 몰락의 수렁을 향해 나아가는 질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말로는 파트너십이 대안이라고 말하지만, 구조화 또는 제도화 되지 않은 파트너십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파트너십 구조를 중심으로 ‘맥도널드 제국’의 성장사를 살펴 보기로 하자.

‘맥도널드 제국’의 독특한 파트너십

미국 메릴랜드대학 사회학 교수 조지 리처(George Ritzer)가 쓴 [맥도널드 그리고 맥도널드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는 미국의 200여 대학에서 교재로 쓸 정도로 맥도널드는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은 맥도널드를 다루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선 맥도널드에 관한 책이 아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합리화이론을 근거로 이 세상의 작동 방식을 탐구한 책이다.

리처는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밖의 세계의 더욱더 많은 부문들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인간화를 ‘맥도널드화(McDonaldization)’라고 부른다. 맥도널드 모델은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으며 세계 각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왜 그럴까? 리처는 맥도널드의 효율성(efficiency), 계산가능성(calculabilit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 그리고 통제(control)에 주목한다.2)

맥도널드의 그런 원리를 만든 창시자는 오늘날의 ‘맥도널드 제국’을 건설한 레이 크록(Ray Kroc, 1902-1984)은 아니다. 맥도널드의 뿌리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패트릭 맥도널드(Patrick J. McDonald)가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에 에어드롬(The Airdrome)이란 레스토랑을 연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레스토랑을 물려받은 그의 두 아들 딕 맥도널드(Dick McDonald, 1909-1998)와 맥 맥도널드(Mac McDonald, 1902-1971)는 1940년 레스토랑을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San Bernardino)로 옮겨 맥도널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레이 크록 회장. 믹서기 세일즈맨이었던 그는 나이 52세에 맥도널드의 사업 가능성을 확신하고 맥도널드 형제로부터 사업권을 따냈다.

25가지 메뉴 가운데 주로 팔리는 게 햄버거라는 점에 착안한 맥도널드 형제는 1948년부터 제조업의 어셈블리 라인 방식을 도입해 햄버거 중심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을 선보였다. 바로 이 시스템이 오늘날 맥도널드 원리의 대부분을 구현한 것이다. 이 방식이 성공을 거두자 맥도널드 형제는 1953년부터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도입해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에 몇 곳의 가맹점을 두었다.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믹서기 세일즈맨인 레이 크록은 1954년 맥도널드를 방문한 후 이게 ‘대박 사업’이 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만, 맥도널드 형제는 50세 이전에 100만 달러만 벌면 은퇴하겠다는, 야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크록은 그런 맥도널드 형제로부터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를 제외한 미국 전역의 가맹점 사업권을 손쉽게 따냈다. 크록은 자서전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54년,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돌아오던 그 운명의 날에 내 서류 가방에는 갓 서명한 맥도널드 형제와의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비즈니스라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상처 입은 노병이었다. 그럼에도 전장에 나가고 싶은 열망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내 나이는 52세였다. 당뇨병에 관절염 초기 증상도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갑상선 대부분과 담낭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 인생의 절정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3)

본사와 가맹점의 상호 운명공동체 구조

크록은 1955년 4월 15일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의 드플레인(Des Plaines)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는데, 이는 맥도널드의 9번째 가맹점이었다. 크록은 이 가게를 본부로 삼아 전국 체인화를 시도했다. 프랜차이즈 시스템은 미국에서 이미 3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었기에, 크록은 한참 뒤처진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간의 프랜차이즈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프랜차이즈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당시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처음부터 고액의 가맹비를 책정해 이걸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래서 가맹점 관리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뽑아낼 건 다 뽑아냈다는 식이었으니, 신경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반면 크록은 최저가의 가맹비를 책정해 진입 장벽을 낮추었다. 다른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저는 처음에 5만 달러 또는 그 이상을 받았는데, 크록이 책정한 가맹비는 그 50분의 1도 안되는 950 달러였으니, 이는 당시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4)

그 대신 크록은 가맹점에게 매출액의 1.9 퍼센트를 본사에 내도록 했다. 이 가운데 0.5%는 맥도널드 형제의 몫이었으므로, 크록에게 떨어지는 건 1.4 퍼센트였다. 이는 가맹점이 성공해서 돈을 벌어야만 본사도 돈을 버는, 상호 운명공동체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크록은 초기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했다. 총매출 수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가맹점들은 번창했다. 미니애폴리스의 한 매장은 1개월 동안 3만7262 달러의 매상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본사는 직원들의 급여를 주기에도 빠듯했다.”5)

1955년에 처음 문을 연 맥도널드 1호점을 본떠 만든 ‘맥도널드 뮤지엄’의 모습.

맥도널드 형제는 앞서 말한 맥도널드 원리를 햄버거를 만드는 데에만 적용했을 뿐,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의 가맹점들에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크록은 맥도널드 원리를 가맹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직접 경영하면서 매장에서 일할 뜻이 없는 사람들에겐 가맹점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특정 개인이 여러 가맹점을 갖는 걸 통제했으며, 지원자의 지역사회 기반과 더불어 열정을 중시했고, 업무 표준화 기준을 만들어 가맹점들이 절대적으로 지키게끔 관리했다. 크록은 특히 ‘QSC & V’ 즉 품질(Quality), 서비스(Service), 청결(Cleanliness), 가치(Value)를 입버릇처럼 강조하면서 가맹점들을 세뇌시켰다.

“전직 식료품점 점원, 소다수 판매점 점원, 군인, 그밖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사람이 맥도널드라는 이름 아래 매장 운영자가 되었다. 기본은 이들의 머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절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다. 기본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만약 내가 ‘QSC & V’라는 구절을 이야기할 때마다 바다에 벽돌을 하나씩 쌓았다면 아마 대서양을 가로 지르는 다리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운영자 역시 그들 매장의 관리자 및 종업원에게 기본을 강조해야 한다. 신규 가맹점인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6)

가맹점을 ‘혁신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대우

맥도널드의 성장사에서 가장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게 바로 가맹점을 혁신의 원천으로 간주해 대등한 파트너 대접을 한 것이다. 단기적인 이익을 놓고 보자면 가맹점 대신 직영점을 두는 게 훨씬 낫지만, 맥도널드는 직영점의 비율이 높아지는 걸 두렵게 생각했다. 그래서 본사 소유의 직영점 비율은 전체 업소의 30퍼센트 이상을 넘지 않게끔 하는 원칙도 정했다(현재 직영점 비율은 15 퍼센트) 거대 관료조직에 소속된 직영점에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더불어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아무런 혁신도 나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맥도널드가 성공을 거둔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는 거의 대부분 가맹점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른 프랜차이저들은 가맹점들에게 설비와 재료를 팔아 큰 차익을 남겼지만, 크록은 가맹점들의 불만을 살 수도 있는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독립적인 설비·재료 공급업체들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들로부터 당시 관행으로 통용되고 있던 이른바 ‘리베이트’도 전혀 받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에게 품질 기준을 엄격하게 충족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7)

가맹점이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하자, 이젠 맥도널드 형제가 성장의 걸림돌이 되었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성장엔 관심이 없는 맥도널드 형제의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 계약서상의 조건이 크록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1961년 우여곡절 끝에 크록은 270만 달러의 빚을 내어 맥도널드 형제의 모든 사업을 인수했다. 큰 빚을 지긴 했지만, 이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크록은 회사 비행기로 미국 전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맥도널드 매장을 세울 곳을 물색했다.

크록은 품질 관리를 위해 1961년 햄버거대학을 세웠는데, 최초 졸업생 18명을 배출한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햄버거학(Hamburgerology) 학사 학위를 수여했다. 부전공은 프렌치프라이였다. 아아, 푸름을 간직한 채 성장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전국 각지의 신문에는 맥도널드가 업계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하고, 지역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가맹점 운영자를 칭송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8)

그러나 한 신입사원은 햄버거대학에 입소한지 2-3일 가량 지난 어느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희들은 다 미치광이야!”라고 외친 후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9) 어떤 사람들에겐 미치광이로 보일 수 있는 열정, 이게 바로 가맹점을 경영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기도 했다. 그게 없인 집요할 정도로 이루어지는 본사의 교육을 감당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크록이 세운 햄버거대학의 한 신입사원은 입소한지 2-3일 가량 지난 어느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희들은 다 미치광이야!”라고 외친 후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에겐 미치광이로 보일 수 있는 열정, 이게 바로 가맹점을 경영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기도 했다. 사진은 1982년 크록의 80세 생일을 맞아 본인이 구단주였던 샌디에고 파드리스 구장을 방문한 크록에게 마스코트인 샌디에고 치킨이 축하를 하는 모습.

“지원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살던 집을 처분하고, 매장이 들어설 지역에 새 집을 구하는 등 운영자가 될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그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는다. 그는 맥도널드 매장에서 추가로 500 시간을 더 일해야 하며 오리엔테이션과 경영 수업에 참석할 것을 권유받는다. 또 개점 4-6개월을 앞둔 시점이 되면 햄버거 대학의 상급 운영 과정을 수강한다. 이를 통해 손님을 맞기 위해 필요한 경영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한층 더 갈고닦는 것이다. 이 모든 준비작업과 교육과정은 맥도널드 가맹권을 얻은 소기업 경영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에도 현장 담당 인력을 통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운영자를 지원한다.”10)

물론 지원은 곧 간섭이기도 했다. 본사 직원들이 매장을 방문해 이모저모 살펴본 뒤 가맹점별로 등급을 매기는 등의 통제를 하는 걸 좋아할 가맹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맥도널드가 1980년대에 품질관리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미군의 모든 기지에 맥도널드 매장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할 절도로 ‘QSC & V’에 집착하며, 그것이 곧 맥도널드의 성공 비결이었으니, 성공과 통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먼저 1달러를 벌면, 우리가 그다음 1달러를 번다.”

1983년 12월 [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위대한 기여를 한 50명 중 ‘선지자’군의 한 명으로 크록을 선정했다. 작가 톰 로빈스는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글에서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세웠으며,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널드화’했다. 이 나라의 대표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것은 전지전능한 컴퓨터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무기 체계도, 정치 혁명도, 예술 사조도, 혹은 유전자 변형 약물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햄버거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크록의 진정한 공로는 미국인의 입맛을 표준화한 것이 아니라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창조한 것이다. 그는 타고난 리더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새로운 사업 구조를 창조하고 수많은 기업가들을 끌어들였다. 이 구조는 높은 수준의 품질과 서비스 제공을 강조하는 동시에 운영자들에게 독립된 사업가로서 자유롭게 매장을 운영하도록 했다. 이들 가맹점 운영자에 본사 관리자와 다양한 식재로 및 설비 공급자가 더해져 하나의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 맥도널드 가맹점은 계속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사업 아이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11)

그렇다. 맥도널드는 늘 뜨거운 논란의 한복판에 선 글로벌 기업으로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간주되지만,12) 잠시 눈을 돌려 경영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가맹점들과의 운명공동체적 파트너십을 형성한 것이 성공 비결이자 중요한 사회적 기여였다. 크록의 다음과 같은 좌우명은 ‘갑질’을 해대는 한국의 프랜차이저들이 꼭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당신이 먼저 1달러를 벌면, 우리가 그다음 1달러를 번다.”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글쓴이 강준만은 언론과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문화사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조지아대에서 신문방송학 석사, 위스컨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9년부터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사 산책(전 23권)](2002~2011), [한국대중매체사](2007), [미국사 산책(전17권)](2010), [세계문화의 겉과 속](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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